본문 바로가기
중등한문

2023학년도 국어영역 EBS 수능특강 연계 지문 최척전(崔陟傳) 전문 (上)

by 학이시습지불역열호 2022. 7. 14.

최적의 자는 백승이며 남원 사람이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 숙과 함께 남원부 서문밖에 있는 만복사의 동쪽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최척은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친구와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사소한 예절에는 구애를 받지 않았다. 이에 그의 아버지가 경계하여 말했다.

네가 배우지 않으면 무뢰한이 될 터인데, 너는 장차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느냐? 하물며 지금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 바야흐로 고을마다 무사를 징집하고 있는데, 너는 쓸데없이 활을 쏘거나 말을 타고 놀며 늙은 아비에게 근심만 끼치고 있으니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머리를 숙이고 선비를 좇아 과거 공부를 한다면, 비록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할 지라도 등에 화살을 지고 군대에 종사하는 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남에 사는 정상사는 나와 죽마고우이다 그는 힘써 배워서 학문이 두텁고도 뛰어나며 또 처음 배우는 사람을 잘 인도하여 가르치니, 너는 성남으로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도록 해라.”

최척은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즉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문을 나서, 정사도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최척의 문장이 날로 발전하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총명하고 민첩함을 칭찬하였다.

 

최척이 정상사의 집에서 공부를 할 때마다 문득 어떤 계집아이가 창 밑에 숨어서 책 읽는 소리를 몰래 엿듣곤 하였다. 그녀의 나이는 겨우 16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머릿결은 구름을 드리운 듯 아름다웠고 얼굴은 꽃처럼 어여뻤다. 하루는 상사가 식사를 하기 위해 내당으로 들어가고 최척이 홀로 앉아서 시를 읊고 있는데, 갑자기 조그만 종이 쪽지 하나가 창 틈으로 들어왔다. 최척이 주워서 읽어보니,  <표유매>의 마지막 장이 씌어 있었다. 최척은 이 글을 본 뒤부터 정신이 날아갈 듯 황홀하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두운 밤을 틈타 향기를 훔치리라고 거듭 마음을 먹었다가도 이내 김태현의 고사를 생각하면서 애써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도의와 욕구가 서로 치고 받았다. 잠시 후에 상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그 종이 쪽지를 소매 속에 감추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푸른 옷을 입은 계집아이가 문밖에 서 있다가 최척의 뒤를 따라오며 말했다.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척은 쪽지에 적힌 시를 보고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차에 이 말을 듣고는 기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여 오라고 한 후 집으로 데리고 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물으니, 그 아이가 대답했다.

저는 이낭자의 계집종인 춘생입니다. 낭자가 저에게 낭군의 화답시를 청해 오라고 하였습니다.”

최척이 의아해서 말했다.

너는 정상사 집의 아이가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이낭자라고 말하느냐?”

춘생이 말했다.

우리 주인댁은 본래 서울 숭례문 밖 청파리에 있었으며, 주인 어른인 경신께서는 일찍 돌아가시고 과부인 심씨가 딸 하나와 그곳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처녀의 이름은 옥영인데, 시를 창 틈으로 던지고 화답시를 요청했던 분이 바로 이 분입니다. 우리는 지난 해 배를 타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다시 나주 땅 회진에 와서 머물러 있었는데, 가을에 다시 회진에서 이곳으로 굴러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우리 마님과 친척이라서 우리에게 무척 잘해 주십니다. 또 장차 낭자를 위해 혼처를 구하려고 하는데, 아직 마땅한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터입니다.”

최척이 말했다.

너의 낭자는 과부의 딸로서 어떻게 한문을 알게 되었느냐?”

춘생이 대답했다.

낭자에게 득영이라는 언니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문장에 능했으나,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일찍 죽었습니다. 우리 낭자는 항상 언니 곁에서 입과 귀로 글을 주워 들어 거칠게나마 이름을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최척은 춘생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이어서 화려한 문체로 답서를 써 일렀다.

 

아침에 받은 훌륭한 글은 실로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게다가 곧이어 청조를 만나게 되니 제 기쁨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매번 거울 속의 그림자에만 의지하고 그림 속의 참모습은 불러내기 어려웠습니다. 님을 사모하는 마음은 유혹할 수 있고 상자 속의 향기는 훔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봉산으로 가는 길은 멀고 약수는 건너기 어려웠습니다. 어떻게 할까 이리저리 고민하고 궁리하는 사이에 이미 얼굴은 누렇게 뜨고 목덜미는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주저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니, 애가 끊는 듯하고 넋은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오늘 빙간의 말과 양대의 비가 홀연히 꿈속에 들어오고 서왕모의 편지가 문득 전해져, 갑자기 성기의 만남을 이루고 월노의 끈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제 삼생의 소원이 거의 다 이루어졌으니, 동혈지맹을 번복하지 마십시오, 글로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데, 말인들 어떻게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옥영은 편지를 받고 매우 기뻤다. 그래서 다음날 또 답장을 써서 춘생에게 전달케 하였는데 그 글에 일렀다.

 

저는 서울에서 생장하였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지금껏 형제도 없이 편모를 모셔왔습니다. 몸은 비록 영락하였으나 마음은 빙호 같으며, 거칠게나마 맑고 깨끗한 행실을 알아 대문 앞에 길가마저도 나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때를 만나지 못하여 세상살이에 어려움이 많고, 전쟁이 어지럽게 일어나 온 가족이 흩어져 떠돌다가 이곳 남쪽 땅까지 이르러 친척에게 몸은 의탁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이미 시집 갈 때가 되었으나 아직 받들어 공경할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항상 옥이 난리에 깨지거나 구슬이 강포한 무리에게 더렵혀질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또 이 때문에 늙으신 어머님께는 근심을 끼치고, 제 스스로도 몸을 보전하기가 어려워 슬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사라가 반드시 교목에게 의지하듯이 여자의 백년고락은 실로 남자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교목처럼 훌륭한 남자가 아니라면 제가 어떻게 결혼할 마음을 둘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곳에서 낭군을 뵈오니, 말씀이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며, 성실하고 진솔한 빛이 얼굴에 넘쳐흐르고, 우아한 기품이 보통 사람보다 한결 빼어났습니다. 만약 제가 어진 남편을 구하고자 한다면 낭군 외에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저는 용렬한 사람의 아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군자의 첩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비천한 자질을 돌이켜 보면 군자의 짝이 되지 못할까 두렵기만 합니다. 어제 제가 시를 던진 것은 실로 저의 음란함을 깨우쳐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단지 시험삼아서 낭군의 의향을 탐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비록 지식은 없으나 원래 사족으로서 애초에 저자에서 노니는 무리가 아닌데, 어떻게 담벼락에 구멍을 뚫고 몰래 만날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부모님께 아뢰어 마침내 예에 따라 혼례를 치른다면, 비록 먼저 사사로이 시를 던져 스스로 중매하는 추태를 범했으나 정절과 신의를 지키어 거안지경을 다하고자 합니다. 이미 사사로이 편지를 주고받아 그윽하고 바른 덕을 크게 잃어버리긴 했으나 이제 간과 쓸개가 비추듯 서로의 마음을 잘 알게 되었으니, 다시는 함부로 편지를 보내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는 반드시 중매를 두어 제가 행로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해주시길 간절히 바라오니, 잘 생각하시어 일을 꾀하십시오.”

 

최척은 편지를 다 읽을 후 마음이 더욱 기뻐서 자기 아버지에게 간절하게 아뢰었다.

들으니, 과부 심씨가 서울에서 내려와 정씨 집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데, 그 딸이 결혼할 나이인데다가 용모가 매우 아름답고 성격이 온순하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불초한 자식을 위해 시험삼아 정상사에게 구혼해 보십시오, 만약 이 일을 늦추시어 지위가 높은 사람이 우리보다 먼저 구혼하게 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우리가 먼저 구혼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저들은 귀족으로 멀리 타향에 와서 잠시 더부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부유한 집에 혼처를 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본래부터 가난하니, 저들이 우리의 구혼을 기꺼워할 리가 없다.”

최척이 거듭 간청하여 말했다.

먼저 물어 보십시오.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이에 최척의 아버지가 가서 물으니, 상사가 말했다.

나의 표매가 서울에서 피난을 와 궁박하게 내 집에 머물러 있는데, 그녀의 외동딸이 자색이 뛰어나고, 재주와 행실이 보통이 아니라네. 그래서 내가 바야흐로 신랑감을 구해 가정을 이루게 하려고 하네. 진실로 자네의 아들이 훌륭한 사윗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단지 자네가 가난한 것이 걱정일세. 그러나 내가 마땅히 누이와 상의를 해서 다시 알려줌세.”

최숙이 집으로 돌아와 이러한 말을 전하자, 최척은 초조한 모습으로 상사의 회답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상사가 심씨에게 최숙이 구혼한 사실을 이야기하니, 심씨가 거절하며 말했다.

저는 온 집안이 유리되어 의탁할 곳 없이 외롭고도 어렵사리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딸을 반드시 부유한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어 의탁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최랑이 비록 어질다고는 하나 그 집안이 매우 가난하다고들 하니,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이날 밤 옥영이 어머니 곁으로 가서 말을 하려다가 머뭇거리니,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숨기지 말고 털어놓아라.”

옥영이 얼굴을 붉히고 말을 못하다가 억지로 입을 열어 말했다.

어머님께서 저를 위해 사위를 고르시되 반드시 부유한 사람만을 구하려고 하시니, 그 마음이 안타깝습니다. 집안이 부유하고 사윗감마저 어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집안은 비록 먹을 것이 풍족하더라도 사윗감이 어질지 못하다면, 그 집안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이 어질지 못한데 제가 그를 남편으로 섬긴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한들 그가 능히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제가 최생을 몰래 살펴보니,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우리 아저씨께 와서 성의를 다하여 성실하게 배웠습니다. 이로 보건대, 그는 결코 경박하거나 방탕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 사람을 배필로 삼을 수만 있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물며 가난한 것은 선비의 본분이요, 떳떳하지 못한 재물은 뜬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청컨대, 최생으로 마음을 정하시어 저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시오. 이것은 처녀가 제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제 일생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끄러움을 꺼려하여 침묵을 지킨 채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용렬한 사람에게 시집가서 일생을 그르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이미 깨어진 시루는 다시 완전하기 어려우며, 물을 들인 실은 다시 희게 할 수 없듯이 일이란 한 번 그르치면 서제막급입니다. 하물며 지금 제 처지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 집에는 엄한 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왜적이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진실로 참되고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 두 모녀로 하여금 우리 가문의 운명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까? 지금은 차라리 안씨가 결혼을 요청하고 서매가 스스로 낭군을 선택한 것을 본받아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의 속마음을 숨긴 채 단지 남의 입만 바라보면서 가까운 곳에 있는 배필을 가만히 놓아두어야 하겠습니까?”

옥영의 모친은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정공에게 아뢰어 말했다.

제가 밤에 다시 생각해 보니, 최씨가 비록 가난하지만 그의 아들이 준수하며 빈부는 하늘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에게 구혼하기보다는 차라리 최랑을 사위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공이 말했다.

누이가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반드시 일이 성사되도록 권하리라. 최랑이 비록 한미한 선비이나 됨됨이가 옥처럼 훌륭하여 서울에서도 이 같은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을 게다. 저 사람이 만약 학업을 완수한다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될 것이니, 어찌 숙맥과 같은 사람이겠는가?”

정공은 바로 그 날 중매쟁이를 최숙에게 보내어 혼인을 약속하고, 오는 9월 보름에 혼례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최척은 너무 기뻐 손가락을 꼽아 가면서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른 뒤였다. 남원부 사람으로 전에 참봉을 지냈던 변사정이 의병을 모집하여 영남으로 가려고 하였는데, 최척은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했기 때문에 의병에 뽑혀서 동행하게 되었다. 최척은 진중에 있으면서 옥영에 대한 근심과 걱정으로 몸이 아프게 되었다. 혼례를 치르기로 약속한 날이 되어 소장을 올려 휴가를 청하자, 의병장이 화를 내며 말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감히 혼사에 대해서 말하느냐? 임금께서도 난리를 당하고 피난을 가서 풀숲을 방황하고 계시니, 이러한 때 신하된 자는 마땅히 창을 베고 잘 겨를도 없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너는 아직 결혼할 나이도 되지 않았으니, 도적을 모두 물리치고 난 뒤에 결혼식을 올리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의병장은 이렇듯 꾸짖으며 끝내 최척의 귀가를 허락하지 않았다. 옥영도 최생이 종군하여 돌아오지 않자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그 날을 헛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옥영은 밥을 먹거나 잠을 자지 못하였으며, 날이 갈수록 근심만 깊어 갔다.

 

이때 남원부중에 양생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안이 매우 부유하였다. 그는 옥영이 어질고 똑똑하며, 최척이 진중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이 틈을 이용해 옥영에게 구혼하기 위해 몰래 뇌물을 주어 정공의 아내와 결탁하였다. 옥영을 양생과 혼인시키도록 권하며 말했다.

최생은 매우 가난해 아침에는 저녁 때 먹을 것이 없어 동쪽에서 빌리고 서쪽에서 구걸해야 하는데, 어느 겨를에 부모를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은 최생이 종군해서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의 생사를 기약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생의 집안은 매우 부유하여 본래부터 재물이 많기로 소문이 나 있으며, 그 아들도 최생 못지 않게 현명합니다.”

이렇듯이 정공 부부가 번갈아 가며 권하자, 심씨는 자못 유혹에 넘어가 즉시 양생과 옥영의 혼인을 허락하고, 10월로 날짜를 잡아 혼례를 치르기로 약속하였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말하니 감옥인들 깨뜨리지 못하리요.’하는 꼴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영은 밤에 어머니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하며 말했다.

최생의 거취는 의병장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최생이 자기 마음대로 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최생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곧바로 언약을 저버리시니, 이보다 옳지 못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제 의지를 꺾으려 하신다면 저는 죽어도 다른 곳으로는 시집가지 않겠습니다. 하늘같은 어머니께서도 몰라주시는데 남들이 어떻게 제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어찌 이렇듯 심하게 고집을 부리느냐? 아아, 어린 네가 무엇을 알겠느냐? 너는 마땅히 이 어미가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다.”

심씨는 딸의 말을 용납하지 않고, 또 더 들을 생각도 없어 곧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에 심씨가 깊이 잠들어 있었는데, 문득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소리가 베갯머리까지 세차게 들려 왔다. 잠에서 깨어나 딸이 자던 자리를 어루만져 보니, 딸이 그 자리에 없었다.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히 찾아보니, 옥영이 비단 수건으로 목을 메고 창살 아래 엎드려 있었다. 손발이 모두 차고 숨소리가 점차 희미해졌으며, 호흡만 목구멍 속에서 오락가락하였다. 심씨는 황망히 목에 메인 수건을 풀고 옥영을 끌어안아 일으켰다. 이때 춘생이 등불을 밝히고 와서 물을 몇 모금 입에 흘려 넣자, 옥영이 겨우 입으로 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옥영이 깨어남에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혀 너나 없이 옥영을 구완하였으며, 이 이후로는 어느 누구도 양씨 집안과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때 최숙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양씨 집안과의 혼사 문제 등 그 동안의 모든 사실을 다 알려 주었다. 최척은 바야흐로 옥영에 대한 그리움으로 오래도록 병이 낫지 않고 침상에 누워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병과 그리움이 두 배나 더 심해졌다. 의병장은 이 이야기를 듣고 즉시 최척을 진중에서 내어보내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집으로 돌아온 최척은 며칠 동안 몸을 조리하고 난 뒤에 점차 병이 낫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1월 초하룻날 정진사 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아름다운 두 남녀가 서로 합치게 되니, 그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혼례를 마친 후 최척이 아내와 장모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옴에 하인과 노비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대청에 오르자 친척들이 축하하여 온 집안에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이들을 기리는 소리가 사방의 이웃으로 퍼져 나갔다. 시집에 온 옥영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머리를 빗어 올린 채 손수 물을 긷고 절구질을 하였으며, 시아버지를 봉양하고 남편을 섬길 때는 효도와 정성을 다하고, 이웃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모두 양홍의 처나 포선의 아내도 이보다는 낫지 않을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최척은 아내를 얻은 이후 구하는 것이 뜻대로 되어 재산이 점차 넉넉하게 불어났으나, 다만 일찍이 자식이 없는 것이 걱정이었다. 최척 부부는 후사를 염려하여 매월 초하루가 되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함께 만복사에 올라가 부처께 기도를 올렸다. 다음 해인 갑오는 정월 초하루에도 만복사에 올라가 기도를 하였는데, 이날 밤 장육금불이 옥영의 꿈에 나타나 말했다.

나는 만복사의 부처로다. 너희 정성이 가상하여 기이한 사내아이를 점지해 주니, 태어나면 반드시 특이한 일이 있을 것이다.”

옥영은 그 달에 바로 잉태하여 10개월 후에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등위에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붉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마침내 최척은 아들 이름을 몽석이라고 지었다.

최척은 피리를 잘 불었으며, 매번 꽃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이 되면 아내와 함께 피리를 불곤 하였다. 일찍이 날씨가 맑은 어느 봄날 밤이었는데, 어둠이 깊어 갈 무렵 미풍이 잠깐 일어나면서 밝은 달이 환하게 비추었으며, 바람에 날리던 꽃잎이 옷에 떨어져 그윽한 향기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이에 최척과 옥영은 술병을 열고 술을 따라 마신 후, 침상에 기대어 피리를 세 곡조 부니 그 여음이 하늘거리며 퍼져나갔다. 옥영이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저는 본래부터 아녀자가 시를 읊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맑은 정경을 대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요.”

옥영은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왕자진이 피리를 부니 달도 내려와 들으려 하는데,

바다처럼 푸른 하늘엔 이슬이 서늘하네.

때마침 날아가는 푸른 난새를 함께 타고서도,

안개와 놀이 가득하여 봉도 가는 길 찾을 수 없네.

 

최척은 애초에 자기 아내가 이렇듯 시를 잘 읊조리는 줄 모르고 있었던 터라 놀라고 또 감탄을 한 후, 즉시 그 시에 화답하여 읊었다.

 

아득한 요대엔 새벽 구름이 떠다니고,

맑은 난소의 곡조는 끊이지 않네.

여향 공중에 울려 퍼짐에 달은 떨어지려 하고,

뜰에 드리운 꽃 그림자는 향기로운 바람에 날리네.

 

최척이 읊기를 마치자, 옥영은 더없이 기뻤다. 그러나 옥영은 즐거움이 다 하면 슬픔이 온다는 것을 아는지라, 처연히 최척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인간 세상에는 뜻하지 않는 변고가 있고, 좋은 일은 귀신이 시기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몇 번이나 헤어지고 다시 만날 지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항상 이것이 근심스러워 마음이 절로 슬퍼지곤 합니다.”

최척이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여 말했다.

굽었다가 펴지고 가득 찼다가 텅 비게 되는 것이 천도의 항상 된 이치요, 길흉과 회한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당연히 겪을 일일 것이오. 만약 불행히 하늘에서 부여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어떻게 슬픈 처지를 한탄하면서 몸과 마음을 게을리 할 수가 있겠소? 부질없는 근심과 고민으로 즐거운 마음을 해칠 필요는 없소.”

이 이후로 최척과 옥영의 애정은 더욱 돈독해졌으며, 서로를 지음으로 자처하면서 하루도 떨어져 생활하는 일이 없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