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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등한문

이생규장전 번역 전문 (전편)

by 학이시습지불역열호 2022. 7. 6.

송도(松都)에 이()씨 성을 가진 서생이 낙타교(駱駝橋) 옆에 살고 있었다. 나이는 열여덟 살이며 풍채가 말쑥하고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다. 일찍부터 국학(國學)에 다녔는데 길을 가면서도 시서(詩書)를 읽고 다녔다.

선죽리(善竹里)의 지체 있는 집안에 최()씨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 있었다. 나이는 열대여섯쯤 되었는데 맵시가 요염하고 고우며 자수(刺繡)에 능하며 시부(詩賦)에도 뛰어났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풍류스런 이 공자여,

정숙한 최 낭자여.

그 재주 그 얼굴은

먹지 않아도 배부르구나.”

 

이 서생은 일찍이 책을 옆에 끼고 국학에 갈 때에는 항상 최 낭자의 집을 지나갔다. 북쪽 담장 너머로는 바람에 간들거리는 수양버들 수십 그루가 둥글게 둘러싸고 있었다. 이 서생은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곤 했다.

하루는 담장 안을 엿보았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는 벌들은 붕붕거리고 새들은 지저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자그마한 누각 한 채가 꽃숲 사이로 아른거렸다. 구슬발이 반쯤 가른 누각에는 비단 휘장이 낮게 드리웠는데, 아름다운 한 여인이 수를 놓다가 수바늘을 멈추고 턱을 고이고 시를 읊었다.

 

홀로 사창(紗窓)에 기대니 수놓기도 더딘데

꽃숲 속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없는 봄바람 부질없이 원망하며

조용히 수바늘 멈추니 떠오르는 상념 하나.

 

길가는 저 서생 누구 집 도령일까,

푸른 깃 넓은 띠 버들가지 사이로 비치네.

오호라, 이몸 변해 제비라도 된다면

구슬발 후려 걷고 담장을 넘어가리.”

 

이 서생은 그 시를 듣고 자기의 재주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집의 담장은 높고 가파랐으며 정원은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는 단지 서운한 마음을 품은 채 국학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이 서생은 흰 종이 한 폭에 세 수의 시를 써서 기와 조각에 매달아 담장 안으로 던졌다.

 

무산(巫山) 첩첩한 안개

그 위로 솟은 봉우리 형형색색 쌓여 있네.

고뇌하던 양왕(襄王) 그곳에서 잠들었으니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양대(陽臺)에서 만나보세.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탁문군(卓文君) 꾀어내듯

사모하는 마음 이미 넘쳐 흘러.

담장 위 만발한 붉은 도리화(桃李花) 요염한데

바람 불어 꽃이 지니 흩어진 곳 어디일까.

 

좋은 인연일까 나쁜 인연일까,

헛된 이내 시름 하루가 한 해 같네.

이십팔 자 시 한 수에 인연이 맺혔으니

남교(藍橋) 어느 날에 신선을 만날까.

 

최씨 처녀는 시녀 향아(香兒)에게 시를 가져오게 하여 읽어 보았다. 바로 이 서생이 쓴 시였다. 그녀는 두 번 세 번 거듭하여 글을 읽은 후 마음이 즐거워져 짤막한 종이에다가 몇 자 적어 담장 밖으로 던졌다.

도련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해질 무렵에 만납시다.”

이 서생은 그 글대로 황혼이 깔리자 처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문득 복숭아나무 가지 하나가 담장 밖으로 넘어와 흔들거렸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넷줄에 매달린 대광주리가 담 밖으로 드리워 있었다. 이 서생은 그것을 타고 담장을 넘어갔다.

동쪽 산에는 밝은 달이 걸려 있는데 꽃 그림자는 땅 위에 머물러 있고 맑은 향기가 그윽히 풍겨나왔다. 이 서생은 신선들이 사는 곳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은근히 즐거웠지만, 사랑을 위하여 몰래 숨어들어왔음을 떠올리자 머리털이 곤두섰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니 최씨 처녀는 꽃숲 속에 앉아 있는데, 시녀 향아와 함께 꽃을 꺾어 머리에 꽂은 채 구석진 곳에 자리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서생에게 미소를 띄우면서 먼저 두 구절을 읊었다.

 

복숭아나무 배나무 사이 꽃송이는 탐스럽고,

원앙금침(鴛鴦衾枕) 위론 달빛이 곱도다.”

 

이 서생은 이어서 읊기를,

 

어느 때인가 봄소식이 샌다면

비바람 무정하고 또한 가련하리.”

 

이 서생이 시 읊기를 마치자 여인은 안색을 고치고 말하기를,

본디 도련님과 더불어 평생을 기추(箕箒)처럼 받들며 영원히 즐거움을 나누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어찌 그런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까? 소첩은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아무 의심하는 마음이 없거늘, 장부의 의기를 지니신 도련님께서 그런 말씀을 대수롭지 않게 하시다니요? 다른 날 규방에서의 일이 부모님께 알려져서 책망을 받는다 하여도 소첩이 감당할 것입니다. 향아는 방안에 들어가 술과 과일을 내오너라.”

향아가 분부대로 떠나자 사방은 조용하여 사람의 소리라고는 들리지 않았다. 이 서생인 묻기를,

여기가 어디입니까?”

여인이 답하기를,

여기는 북쪽 정원 가운데 있는 작은 누각 아래입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외동딸인 저 하나를 매우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부용지(芙蓉池) 못 가에 따로 누각을 지어주셨습니다.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니 저로 하여금 시비와 더불어 그 경치를 즐기도록 하셨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집안 깊숙한 곳에 거처하시니, 비록 웃고 떠든다고 한들 쉽게 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인은 이 서생에게 향기로운 술을 한잔 따라 권하면서, 고풍시(古風詩) 한 편을 읊었다.

 

난간에 몸 내밀고 부용지 바라보니

물 위 연꽃 무리 사람과 함께 속삭이네.

향기로운 안개 자욱하고 봄빛은 따스한데

새 노래 지어 내어 백저(白紵)를 부르도다.

달빛은 꽃그늘 비쳐 모포에 스며들고

긴 가지 잡아당기니 꽃비가 뿌리도다.

부는 바람 향기 날려 옷자락에 묻어나고

가녀(賈女) 봄나들이 봄볕 아래 즐겁도다.

비단 소매 한 번 떨쳐 해당화를 희롱하니

꽃 속에 잠든 앵무새 놀라서 깨어나네.”

 

이 서생이 즉시 화답하기를,

 

우연히 도원(桃源)에 드니 꽃들은 만발하니

사모하는 마음이야 말로 할 수 없구나.

취환(翠鬟) 갈래 머리 금비녀 낮게 꽂고

선명한 봄 적삼 새로 지어 푸르도다.

봄바람 산들 불어 꽃봉오리 꺾었으니

많고 많은 꽃가지에 비바람 불지 마오.

나부끼는 선녀의 소매 너울너울 흔들리고

계수나무 그늘 속엔 항아(姮娥)가 춤을 추네.

좋은 일 마치기 전에 근심이 따르는 법,

새로이 노래 지어 앵무새 깨우지 마오.”

 

이 서생이 읊기를 마쳤다. 여인이 이 서생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분명 작은 인연이 아닙니다. 도련님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어 우리의 정을 맺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을 마치고 여인이 북쪽 창문으로 들어가자, 이 서생도 여인을 따라갔다. 누각에는 방이 하나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과연 그 안에 들 수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문방제구(文房諸具)를 펼쳐 놓을 수 있는 책상은 매우 깔끔했고, 한쪽 벽에는 연강첩장도(煙江疊嶂圖) 한 폭과 유황고목도(幽篁古木圖) 한 폭이 걸려 있었다. 모두 이름난 그림이었다. 그림 위에는 시가 적혀 있었는데 누가 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첫 번째 그림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 있었다.

 

그 누가 붓 끝에 힘이 넘쳐

깊은 강 첩첩한 산을 이렇게 그렸을까.

웅장도 해라, 방호산(方壺山) 삼만 장,

구름 위로 솟아나니 높고도 높구나.

산자락 멀리 뻗어 아득히 몇백 리,

눈 앞의 가파른 모양은 푸른 소라 같네.

드넓은 푸른 물결 하늘가에 닿았는데

해질녘 바라보니 고향 생각 솟아나네.

그림 바라보니 쓸쓸하고 삭막해

상강(湘江) 비바람에 배 띄운 듯하네.”

 

, 다른 그림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바람 부는 그윽한 대숲 구슬픈 소리 울리고

우뚝 솟은 고목나무 사모의 정 품은 듯.

이리저리 굽은 뿌리 푸른 이끼 끼어 있고

구부러진 늙은 가지 벼락에 시달렸네.

가슴 속 담겨 있는 조화로운 뜻,

묘한 이 풍경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할까.

위언(韋偃)과 여가(與可) 이미 죽었으니

드높은 조화로움을 몇 사람이나 알까.

활짝 갠 창 너머로 그윽히 마주 보니

환상적인 그 경지 볼수록 사랑스럽네.”

 

한쪽 벽에는 사시(四時)의 경치를 읊은 시가 한 폭 걸려 있었다. 그 또한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필법은 송설(松雪)을 본받아서 서체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그 한 폭에 쓰인 것은 다음과 같았다.

 

부용장(芙蓉帳) 은은한 향기 실처럼 걸려 있고

창 밖에는 살구꽃 비내리듯 뿌려지네.

누대 위 하룻밤 꿈 파루(罷漏) 소리에 사라지니

신이화(辛夷花) 짙은 둑에 백설조(百舌鳥) 울어대네.

 

제비 나는 긴 하루 규방은 깊숙하니

게으름만 늘어 말없이 수바늘 멈춘다네.

꽃가지 아래로 쌍쌍이 나는 나비,

그늘진 동산에서 지는 꽃 다퉈 좇네.

 

서늘한 산들바람 푸른 치마 스쳐가니

부질없는 봄바람에 애간장이 끊어지네.

말 못하는 이 심정 누가 알아줄까,

온갖 꽃 피어난 뜰엔 원앙새 춤을 추네.

 

봄빛 깊게 들어 세상에 가득한데

붉은 빛 푸른 빛은 사창(紗窓)에 비치도다.

정원을 바라보며 봄기운 이기지 못해

주렴을 살짝 걷고 지는 꽃 바라보네.”

 

, 두 번째 폭에 쓰인 것은 다음과 같았다.

 

피어나는 밀싹 위로 어린 제비 파닥이고

남쪽 정원 곳곳에는 석류꽃 피는구나.

푸른 창가엔 아가씨 가위 소리

자주 구름 잘라내어 붉은 치마 만든다네.

 

매화 열매 익는 시절 가랑비 뿌리고

홰나무 그늘 꾀꼬리 울고 주렴으로 날아드는 제비.

이 한 해 풍경은 또 지나가니

동화(棟花) 떨어지고 새 죽순 솟아나네.

 

푸른 살구가지 집어 꾀꼬리를 깨우니

마루위 서늘한 바람 해 그림자 뉘엿뉘엿.

연잎 향기롭고 못물은 가득해,

푸른 물결 깊은 곳에 노자 목욕하네.

 

() 평상 대자리에 물결 아른거리는데

소상강(瀟湘江)에 조각구름 떠 있는 병풍 한 폭.

고달픔 못 이겨 낮잠을 설치고 나니

창가에 비끼는 해 서산으로 뉘엿뉘엿.”

세 번째 폭에 쓰인 것은 이러했다.

가을 바람 싸늘한데 찬 이슬 맺히고

달빛은 선연한데 강물은 푸르도다.

한 소리 두 소리 기러기 날아오니

또다시 들리는 금정오동(金井梧桐) 지는 소리.

평상 밑에 온갖 벌레는 구슬프게 울어대고

평상 위 예쁜 여인은 구슬 같은 눈물만.

고운 임 멀리멀리 싸움터에 가셨으니

오늘밤 옥문관(玉門關)에도 저 달빛 비추려나.

 

새옷을 만들려니 가위가 싸늘해

나직히 시녀 불러 인두를 청했지만,

인두에 불 꺼진 줄 미처 몰랐으니

나직이 혀를 차고 머리 한 번 긁적이네.

 

작은 못 연꽃 지고 파초잎도 퇴색하고,

원앙(鴛鴦) 새긴 기왓장은 첫서리에 젖었다네.

묵은 근심 새 정한(情恨) 막을 길이 없는데

구슬피 들려오는 골방 귀뚜라미 소리.”

 

, 네 번째 폭에 쓰인 것은 이러했다.

 

매화 가지 하나 창가에 어른거려

바람 센 서쪽 행랑 달빛은 밝구나.

화롯불 아직 살아 부저로 뒤적이고

고개 돌려 아이 불러 차솥을 바꾸도다.

 

간밤에 내린 서리 나뭇잎 놀래키고

돌개바람 눈을 날려 긴 복도에 뿌려대네.

부질없는 하룻밤 임 그리는 마음,

옛적 싸움터인 빙하(氷河)를 헤매이네.

 

창에 가득 붉은 햇빛 봄날처럼 따사롭고

근심 어린 예쁜 눈썹 졸음 마저 엿보이네.

병에 꽂힌 작은 매화 봉오리는 반만 피어

부끄러워 말 못하고 원앙새만 수를 놓네.

 

서리 바람 싸늘히 불어 북쪽 숲을 뒤흔들고

달밤에 우는 겨울새 근심만 더해 주네.

등불 앞 떨어지는 임 그리는 눈물에

가는 실 젖어 꺾여 바늘 꿰기 힘들구나.”

 

한편으로 따로 작은 방이 있었다. 각종 침구가 매우 정결했고, 휘장 밖에는 사향(麝香)을 피우고 난고(蘭膏) 등잔불을 밝혔는데, 그 빛이 환하여 대낮과 다름이 없었다.

이 서생은 여인과 더불어 사랑의 환락을 마음껏 누리며 며칠을 머물렀다. 이 서생이 여인에게 이르기를,

옛 성현들께서도 부모님이 계시면 놀러 나갈 때에는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야 한다고 하셨소. 나는 집을 나온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니, 부모님께서 반드시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실 것이오. 어찌 사람의 자식으로서 할 도리라 하겠소.”

여인은 서글프게 여기면서도 이에 따를 수밖에 없어 담을 넘어 보내주었다. 이 서생은 그 이후로 저녁이면 최 처녀의 집을 찾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이 서생의 아버지가 꾸짖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것은 장차 성현의 인의(仁義)의 격언을 배우려는 것인데, 요사이 저녁에 나가서 새벽에 돌아오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 필시 경박한 무리들을 흉내내어 남의 담장을 엿보고 규방의 처자를 희롱하는 것일 테니, 이 일을 사람들이 알면 모두 내가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지 않았다고 할 것이요, 그 처자의 집이 지체 높은 명문이면 반드시 네 미친 행동 때문에 문호(門戶)를 더럽히고 가문에 누가 될 것이다. 이는 작은 일이 아니니, 너는 속히 영남(嶺南)으로 내려가 집안 노비들이 농사하는 것을 감독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그리고 다음날 아침 즉시 울주(蔚州)로 아들을 떠나 보냈다.

최 처녀는 매일 저녁 화원에서 이 서생을 기다렸다. 몇 달이 지나도 오지 않자 무슨 병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하여 향아에게 명하여 몰래 이 서생의 이웃에게 물어보게 하였다. 이웃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집 도령은 아버지께 죄를 지어 영남으로 떠난 것이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오.”

최 여인은 이 말을 전해 듣고 병이 생겨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며 일어서질 못하고, 물 한 모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며,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고, 얼굴색은 생기를 잃고 초췌하였다. 부모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그 상태가 어떤지를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처녀 방에 있는 상자를 뒤져 보니 이 서생과 주고 받은 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릎을 치며 놀라 말하기를,

아이구, 자칫하면 딸을 잃을 뻔했구나.”

딸에게 묻기를,

이 서생이 도대체 누구냐?”

이에 이르자 최 여인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모에게 사실을 아뢰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를 키워 주신 은혜가 깊사온데 어찌 숨기겠습니까. 소녀가 가만히 생각하건대 남녀간의 감정이라는 것이 인간의 정리(情理)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떨어지는 매화 열매처럼 좋은 날 놓치지 말라 시경(詩經)주남(周南)’에서 노래하였고, 여자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면 흉하다는 것은 복희씨(伏羲氏)가 쓴 역경(易經)에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는 냇버들과 같이 여린 몸으로 뽕잎이 시드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옷에 이슬을 묻힘으로써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었습니다. 덩굴과 이끼가 나무에 의탁해 피어나는 것처럼 이미 위아(渭兒)처럼 한 남자의 아낙이 되었으니, 죄가 이미 가득하여 그 누가 가문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저 짓궂은 도련님과 하룻밤 정을 통하였으니 원망만 까마득하게 쌓일 따름입니다. 보잘것없고 약하기만 한 소녀의 몸으로 홀로 괴로움을 참으려 하니, 사모하는 그리움은 날로 더하고 마음의 병은 날로 깊어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원한 맺힌 귀신이 될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주신다면 제 남은 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을 것이나, 만일 거절하신다면 죽음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마땅히 이 서생과 더불어 황천(黃泉)에서 만날지언정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지는 않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부모는 이미 그녀의 굳은 의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두 번 다시 그녀의 병에 관해 묻지 않고 한편으로 경계하고 한편으로 달래며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또한 중매쟁이를 시켜 예를 갖추어 이 서생의 집으로 보내니, 이 서생의 아버지는 이씨 가문과 최씨 가문의 우열에 대해 물은 후 말하기를,

우리 집 망나니가 비록 어려서 바람난 짓을 하였지만 학문에 정통하였고 신수가 제법 사람답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뒷날 용두(龍頭)를 차지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릴 수 있겠지요. 그러니 그 배필을 급히 구할 생각은 없습니다.”

중매쟁이가 돌아와 이 말을 전하니, 최씨는 중매쟁이를 다시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친구들이 모두 그 댁 아들이 재주가 뛰어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찌 평범하게 묻혀 지내겠습니까? 의당 빨리 혼례를 치러 두 가문이 하나가 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중매쟁이가 다시 이 말을 이 서생의 아버지에게 전하자,

나 역시 젊어서는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익혔지만 다 늙도록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노비들은 이리저리 흩어지고 친척들도 도와주지 않는데다가 생활이 짜임새가 없어 가계가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권세 있는 대가에서 어찌 이런 빈곤한 선비의 자식을 사위로 삼으려 한다는 말입니까. 이는 필시 허튼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내 가문을 과하게 꾸며 말하여 지체 높은 집안을 속이려는 것입니다.”

중매쟁이가 이를 최씨 집안에 전하니 최씨가 말하기를,

납채(納采)의 예()에 관한 예물 일체는 우리 집에서 다 처리할 터이니, 좋은 날을 가려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기를 희망합니다.”

중매쟁이가 다시 이 이야기를 전하니 이씨 집안에서도 마침내 고집을 꺾고 사람을 보내 이 서생을 불러 그의 뜻을 물었다. 이 서생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시 한 수를 지었다.

 

깨진 거울 다시 합칠 때가 왔으니

은하수엔 오작교 우리 만남을 돕는구나.

마침내 월하노인(月下老人) 붉은 실 맺어주니

봄바람에 우는 자규(子規) 원망일랑 말지니.”

 

최 처녀는 이 사실을 알고 병세가 차차 나아졌다. 그녀 또한 시를 지으니,

 

나쁜 인연이 이제는 좋은 인연 되어

다짐했던 그 맹세 드디어 이루었네.

임과 함께 녹거(鹿車) 끌고 갈 날 언제일까.

아이야 날 일으켜 다오, 꽃비녀 매만지리라.”

 

이에 길한 날을 선택하여 혼례를 치르니 인연의 실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부부가 된 이후부터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기를 손님을 대하듯 하니 비록 홍광(鴻光)이나 포환(鮑桓)이라 한들, 그들의 절개와 의리를 따를 수 없었다. 이 서생은 다음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니 그 이름이 조정 구석구석에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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