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란?
일제강점기 6·106·10 만세사건과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 학생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학생들에게 자율역량과 애국심을 함양시키기 위해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날인 11월 3일을 기념하여 제정되었다.
1953년 10월 20일 제16차 임시국회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적 사명을 강조하기 위하여 1929년 일제에 항거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일인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의결하여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여 매년 정부가 ‘학생의 날’을 기념하여 왔다. 그러나 1973년 3월 30일 이른바 유신시대에 학생들의 반독재·민주화 투쟁이 계속되자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하는 목적으로 제정된 대통령령(제6615호) 「각종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다시 ‘학생의 날’을 부활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져, 정부의 공식기념일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자체적으로 행사를 치르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학생의 날’은 항일 독립운동의 정신을 민주주의 운동의 정신으로 계승한 측면이 있다. 1982년 9월 14일 ‘학생독립운동 기념일 제정에 관한 건의안’이 국회에 상정되었고, 1984년 9월 22일 국가기념일인 ‘학생의 날’로 부활하였으며, 2006년 2월 9일 국회에서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 변경이 의결되어 오늘에 이른다.
광주학생항일운동
가. 배경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정책이 가중됨에 따라 조선인 교육에 대한 불평등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일본인 교사들이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였으며, 조선역사와 조선어 교육을 소홀히 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의 불평등에서 오는 반일감정이 동맹휴학의 방법으로 폭발되어 전국적으로 많은 동맹휴학이 중등학교에서 일어났다.
나. 전개
이러한 불만이 쌓여서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만 5개월 동안 전국적으로 계속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 통학하는 광주 중학생(일본인)과(일본인) 광주고 보생(조선인)(조선인) 사이의 충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중학생 후쿠다 등이 광주여자고보3년생인 박기옥 등 여학생들의 댕기 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하자, 이때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인 광주고보2년생 박준채와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 나주 역전에서 광주고보생들과 광주 중학생들 사이의 편싸움으로 번졌다. 이에 일본 순경들은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들을 편들고 박준채를 구타했다. 일본 신문인 〈광주일보〉도 일방적으로 일본 학생들을 옹호하는 신문보도를 했다. 역전충돌은 11월 3일에 조선인 학생과 일본 학생의 집단적 격돌로 발전했다. 그날은 일제의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이었다. 명치절 기념식을 끝낸 광주고보생들은 일방적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광주일보사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한 광주고보의다른 학생들은 신사 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 일본 학생들과 광주천에서 맞붙어 광주 역전까지 쫓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 중학생 수백 명이 검도 등으로 무장을 한 채 광주 역전으로 몰려들자, 광주고보생들은 농교생들과 합세하여 일본 학생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충돌에서 조선인 학생은 9명, 일본학생은 26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광주일보사를 습격했던 광주고보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투쟁방법을 토론하다가 광주 역전에서 일본 학생들과 충돌했던 학생들의 보고를 듣고 가두투쟁을 결행하기로 결의하고 목봉·삽·곡괭이 등으로 무장, 약 300명이 대오를 편성하여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조선독립만세’·‘일본제국주의타도’·‘광주중학타도’·‘식민지교육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도 합세하여 시위대는 한때 3,000명까지 달했다. 일제는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조선인 학생 75명을 구속했다가 그중62명을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일본 학생은 77명 만을 구속했다가 모두 석방했다. 학생들 간의 충돌에 일제가 극히 편파적 대응을 하자,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다시 분노했다. 신간회와 조선 청년동맹․학생 전위 동맹에서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했다. 신간회 광주지회를 비롯하여 재광주 사회단체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를 위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광주 장날을 기해 2차 봉기하기로 결정했으며, 〈학생대중아! 궐기하자〉라는 격문을 작성했다. 이 격문에서 “검거자를 즉시 우리들이 탈환하자,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시켜라,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민족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전국 학생대표회의를 개최하라 등”의 9개 항목을 선언했다. 11월 12일 광주학생들은 2차로 다시 봉기했다. 광주고보․광주농교․광주사범의 학생 시위대는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구속자 석방’과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2차 시위에서 광주고 보생 약 300명과 농교생 약 100명이 경찰에 구속당했다. 엄격한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생시위 사실은 전국에 알려져 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장기적인 최대의 항일 학생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항일투쟁에는 54개 소학교와 136개 중학교, 4개의 전문학교가 나섰으며 참가인원은 5만45만 4천여 명, 구속자 1642명, 무기정학 2330명, 퇴학처분 582명 등 대탄압을 받으면서도 ‘조선의 독립’과 ‘식민지 교육 철폐’를’ 부르짖으며 뜨겁게 싸웠다. 그리고 ‘약소민족해방 만세’, ‘제국주의 타도 만세’, ‘피압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문구가 들어있는 전단을 뿌리기도 하였다.
3. 역사적 의의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3·1운동3·1 운동, 6·10 만세운동에 이어 학생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선포한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압제를 물리치고 이 땅의 주인으로 당당히 서기 위해 전국의 학생들이 일치단결하여 피 흘려 싸운 것이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야수와 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청년학생의 의기와 민족애를 치열하게 보여줌으로써 항일 민족해방운동의 선봉적 역할을 하였고, 모든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다. 해방 후에도 학생은 4·194·19 혁명 등 민족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온몸을 던져 민족의 앞날을 개척하는 등 민족의 횃불 역할을 해왔다. 사회와 역사의 떳떳한 주인으로 한걸음 내딛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의 기원이 되고 있는 광주학생 항일운동은 우리를 밀어주고 끌어주는 자랑스러운 전통이다.
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옛 선배들의 자주정신, 독립정신, 그 민족적 사명감을 되새기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광주 학생 독립운동 동지회, “광주 학생 독립운동사”
조선 학생 청년 대중이여! 당신들은 저 제국주의 이민배의 광만적인 폭거를 확실히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광주 조선 학생 동지들의 학살의 음모인 동시에 조선 학생 대중의 압살적 시위이다. 전 세계 약소민족에 대한 강압적 백색테러의 행동이다. … 소위 저들의 사법 경찰을 총동원하여 광주 조선 학생 동지 400여 명을 참혹한 철쇄에 묶어 넣었다. …
1. 검속 당한 광주 조선 학생을 즉시 탈환하라!
1.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반대하라!
1. 살인적 폭도 일본 이민군(移民群)을 방축(放逐)하라!
1. 신간회·청총에 민족적 환기를 호소하라!
1. 세계 피압박 대중 건투 만세!!!
< 내용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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